▲ 화석정은 야은 길재가 살던 곳으로 이이의 5대조부 이명신이 지었고 이이가 중수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38)에 대한 그 흔한 오해 하나. ‘이이의 고향은 강릉이다’

이이는 세 개의 호를 썼다. 하나는 율곡이고 다른 하나는 석담(石潭), 나머지는 우재(?齋)다. 율곡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 밤골마을’이다. 이이의 고향마을이다. 자신의 직계 선조들이 살던 곳이다.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 그리고 자신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또 이이를 배향하는 자운서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8살이 되던해 율곡으로 들어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호 율곡은 고향마을에서 따왔다. 이이의 고향은 파주다.

두 번 째 호 석담은 황해도 해주의 석담에서 따왔다. 이이는 35세(1570년, 선조 3년)해에 자신의 거듭된 정치개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의 야두촌으로 들어갔다. 그의 처가인 노씨 문중의 전장이 있는 곳이다. 그는 야두촌에서 고산에 있는 석담구곡에 놀러갔다가 빼어난 산세에 빠져 그곳에서 엎드려 살기로 했다. 그때 석담의 지명을 빌려 두 번 째 호를 ‘석담’이라 했다. 이이는 은병정사를 세우고 주자의 ‘무이구곡’을 벤치마킹해 ‘고산구곡’을 선정하고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이가 이황 조식등 영남학파와 대립하는 ‘기호학파’의 종조가 된 데는 파주와 해주가 그의 삶과 철학의 주요 무대였기 때문이다.

고 박정희전대통령이 쓴 화석정 편액글씨
우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원진사는 물론 문과 복시 전시 등 9번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아홉번이나 장원한 어른)’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이이가 왜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불렀을까. 공자와 맹자, 가까이는 주자를 모델로 삼은 조선의 선비입장에서 보면 아직 자신은 갈길이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3살에 진사초시에 합격했던 이이에게 ‘소년등과’의 부작용은 없었던 것이다.율곡은 8살에 강릉 외가살이를 끝내고 파주로 돌아왔다. 파주에서 그는 5대조 이명신(1392~1459)이 지은 화석정을 찾아 편액이름을 시제로 시를 짓는다. 8살에 지은 시라고 ‘팔세부시’라는 별칭도 있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 끝없이 일어나네
멀리 보이는 저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그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이의 시 ‘화석정’

화석정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이이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이 시는 이이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노산 이은상은 그의 기행문 ‘적벽유’에 ‘화석정에 걸린 시판을 보니 그 시는 창령후인 매련거사’의 작임을 알겠더이다. 시 작자의 오전(誤傳)처럼 섭섭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문제의 현판은 6.25 전쟁때 불타 없어졌다. 화석정은 본래 고려말의 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 ~ 1419)가 살던 곳인데 이이의 5대조부인 이명신이 물려 받아 정자를세우고 온작 화초와 괴석을 심었다. 이숙함이라는 사람이 중국 당나라 재상인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의 기문 중에서 ’화석‘을 따서 이름했다. 그후 이이가 중수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여가를 내 이곳을 찾았고 벼슬을 물러난 뒤에는 제자들과 함께 학문과 시를 논했다.

화석정은 파란만장한 한민족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겼다. 임진왜란 때다. 율곡은 살아있을 때 틈 나는 대로 화석정 기둥에 기름칠을 하게 했다. 율곡이 죽고 8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일행은 임진나루에서 밤을 맞는다. 적군은 뒤쫓아 오고 한치 앞을 볼 수 없어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했다. 그때 강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피난길을 지휘하던 이항복이 임진나루 위에 있는 화석정에 불을 질러 길을 밝힌 것이다. 이이가 평소 기둥에 기름칠을 열심히 하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한 ‘선견지명’덕에 선조는 무사히 강을 건넜다. 화석정은 1673년(현종 14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됐으나 6.25 전쟁 때 다시 불탔다. 현재의 정자는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하나로 세워졌다.

화석정의 느티나무는 560년된 보호수다.
화석정은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임진강 건너 장단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시인 묵객이 많이 찾았다. 이이와 동갑내기 친구였던 송강 정철도 이이가 죽은 뒤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산이 서로 등졌지만 맥은 본래 한가지요
물이 따로 흐르지만 근원은 하나로세
화석이라 옛 정자에 사람은 아니 뵈니
석양이라 돌아가는 길 혼이 거듭 녹아나네


정철과 이이는 21살에 과거에 급제해 함께 사가독서하며 마음을 나눴던 친구사이였다. 이이는 정치적 격랑기에 늘 뒤를 봐주던 후원자였으며 마음을 나누던 동지였다. 이이가 떠나자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렸다. 정철은 이이 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정철은 이이를 그리워 하며 여러편의 시를 남겼다. ““남들은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지만/ 나는야 저승이 이승보다 나을레라 /율곡이랑 군망을 좌우에 손잡고 / 한밤중 솔바람 푸른 산에 누우리니.”

화석정시비. 율곡이이가 8살때 고향 율곡으로 돌아온 그해에 화석정에 올라 지은 시다.
허균의 형 허봉은 1574년 중국 사신으로 가던 길에 율곡에 들러 이이를 만나고 화석정에 올랐다. 허봉은 이에 앞서 6년전 송응개 박근원과 함께 병조판서이던 이이를 탄핵했다가 각각 강계와 회령, 갑산으로 당한 적이 있다. 허봉은 ‘조천기’에서 이이를 만난 상황과 화석정의 풍광을 잘 묘사했다.“율곡은 파주 서쪽 16~17리쯤에 있는데 숙헌은 병으로 아직 일어나 못하였으므로 조카를 시켜서 나를 맞이하여 서설에 들어가 기다리게 했다. 오래 있다가 율곡이 나왔는데 그의 안색을 보니 전날과는 달랐고 매우 피로해 보였다.(중략)숙헌과 작별을 고하고 고개를 넘어서 이른 바 화석정이라는데를 올랐다. 그 집은 새로 지었는데 아직 칸막이를 하지 않았다. 임진강이 띠같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서쪽 경계로는 여러 산을 손짓하는데 비록 넓게 트인 것 같으나 형세를 지나치게 높고 가파르기 때문에 오래 있기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화석정은 이이가 정자에 머물기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탔던 모양이다. 이이보다 한 시대 앞서간 서거정도 이곳에 들러 7언배율 32구의 장시를 남겼다.“화석정 위의 구름은 천 년의 옛구름이요/ 화석정 아래 강물은 절로 흘러만 가는데/ 화석정의 주인은 적선의 후예이기에/ 풍류와 시주가 가업을 이을만 했도다 (중략) 어찌하면 돛단배로 큰 파도를 헤쳐가 / 만 말의 술을 싣고 한번 서로 방문해서 / 고래처럼 들이마시고 곤드레 취하여/ 두 다리로 뱃전 치며 고성방가를 해 볼꼬”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김종서는 이이에 앞서 화석정을 중수한 이의석을 위해 시를 남겼다. “이후는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로다. 선조의 당을 지금까지 잘 보전하였네” ‘화석정 그림에 이판관 의석을 위하여 읊다’ 이덕무도 화석정에 들러 시를 썼다. 그는 화석정을 거쳐 임진강을 건너는 여행길에서 “ 옷이 밝으니 나무 끝의 저 강은 달 빛을 이루었고/ 짚신이 따뜻하니 성 밑 길이 꽃밭으로 들어가는구료”라며 상징 짙은 시를 화석정과 임진강에 남겼다.

조선시대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화석정은 풍광이 예전 같지 않다. 정자 아래에는 자유로와 연결되는 도로가 뚫려 정자와 임진강 사이를 가로 막아섰다. 차들은 끊임없이 북쪽으로 향하거나 남쪽으로 향했다. 소음과 속도가 은둔과 침잠의 정자를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강 건너 장단 평야에는 전차부대가 들어섰다. 너른 들판에 웅크리고 있는 전차가 괴기 스럽다. 정자 옆을 시립하고 있는 수백년된 향나무와 느티나무만이 유서 깊은 정자의 역사를 증거하고 서 있다. 현재의 화석정 편액은 박정희전 대통령이 썼다. 편액에 국정농단으로 영어의 몸이 된 딸 박근혜전 대통령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화석정은 아픈 역사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