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가의 주류인 김씨 시조가 '김알지공'

계림

탈해왕대 8월의 어느 날,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은 이를 탈해임금에게 보고했다.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고사(故事)와 같았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 지었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 삼국사기에는 세한(勢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았는데,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처럼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삼국사기도 비슷하다. 결론은 신라왕가의 주류를 차지하는 김씨의 시조가 김알지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무대왕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비문의 상당 부분이 마모되었지만, 문무왕가의 연원(淵源)을 적은 앞부분에 ‘秺侯祭天之胤(투후제천지윤)’이라는 글이 판독되기 때문이다. “투후, 하늘에 제사할 후손...”인데, 문무왕의 선조 내지 김씨의 시조를 밝히는 부분에 투후를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투후는 한나라의 김일제(金日?)가 한무제(漢武帝)로부터 받은 작위인데, 김일제로부터 그의 증손인 김당(金當)까지 전해졌다.

그럼 김일제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한서(漢書)’ ‘김일제전’에 의하여 고찰한다. 김일제는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한무제 원수(元狩) 연간(BC 122-117)에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흉노의 우지(右地)를 격파하고 휴도왕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얻는 등 연승하였다. 이에 선우가 이곳의 책임자인 곤야왕과 휴도왕을 주살하려 하니, 둘은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런데 휴도왕이 후회하자 곤야왕이 그를 죽이고 그 무리들을 이끌고 한에 항복하니 곤야왕은 열후에 봉해졌고 휴도왕의 부인 알씨(閼氏)와 아들인 일제 및 윤(倫)은 황문(黃門)에서 말을 기르는 노비가 되었다. 이때 일제의 나이는 14세였다. 무제가 말을 구경하면서 잔치를 열었는데 곁에는 후궁들이 가득 찼다. 일제 등 10인이 말을 끌고 지나다가 몰래 훔쳐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일제만 태연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 2촌이었으며, 용모는 중후하였다. 그가 기르는 말 또한 살찌고 아름다웠기에 무제가 깊이 총애하여 발탁했다. 어느 날 망하라(莽何羅)가 무제를 암살하려 비수를 들고 침실에 궁궐에 들어갔는데 일제가 이를 막아 황제를 구했다. 무제는 마침내 그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고 곽광(霍光)과 함께 어린 황제를 부탁하며 투후에 봉했다. 그런데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의 이종사촌인 왕망이 찬역하여 신(新)나라를 세웠다가 다시 멸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김씨 일족은 멸문의 화를 입었다. 여기서 김씨 일족이 화를 피해 한반도로 이주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처럼 신라의 김씨가 흉노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 반론도 많은데, 다음 회에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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