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49.5㎞…뛰어난 자연풍광과 애잔했던 역사 체험 '각광'
크기는 제주도의 절반, 울릉도의 10배 정도, 본섬 외에 109개의 작은 섬이 있고 섬 전체의 80%가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는 대한해협에 외로이 솟아있는 역사의 섬.
옛날 우리와 동일 생활문화권에 속했던 대마도(對馬島), 일본말로 쓰시마(對馬). 우리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으며 평화시대에는 양국 선린 교류의 창구로서 조선통신사 행렬의 첫 기착지며 전쟁시대에는 대륙, 한반도 진출의 최일선 병참기지로서 왜구의 본거지였던 대마도(對馬島)가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밀접하기 때문에 섬 일대에는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 널려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을 맞기 위해 세워진 고려문과 자료관에는 고려판 대장경·대반야경과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隆起文)·무문(無文) 토기, 조선 간행본 ‘훈몽자회’ 등 한반도에서 건너온 대륙계 문물인 불상 경전 청자 등이 전시돼 있다.
비문에는 ‘이왕가(李王家)·종가(宗家) 결혼봉축기념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원래 덕혜옹주 기념비는 반쇼인(萬松院·대마도주 무덤) 안에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다. 한국 관광객이 늘어나자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이즈하라 중심가 뒤쪽에는 백제에 의해 건립된 사찰이자 구한말 항일의병의 상징인 높이 2m가량의 ‘최익현 선생 기념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가 있다.
대마도 중앙부 토요타마(豊玉)에 있는 와타즈미 신사(神社)는 대마도 대표적 신사로 바다의 신을 모신 곳으로 일본 신사가 모두 본토의 왕궁을 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반도 쪽으로 향해 있다. 섬 북쪽 카미쓰시마(上對馬) 해안 언덕의 조선역관사 위령비는 1703년 조선 역관사 108명을 태운 배가 인근 와니우라로 들어오던 중 기상악화로 조난을 당해 전원이 숨진 참사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양국 유지들이 비석을 세웠다.
한적한 어촌인 미나토(溱)의 ‘박제상 기념비’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구하고 자신은 붙잡혀 자신을 회유하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며 목숨을 잃은 박제상의 기념비석이다.
이외에도 대마도(對馬島) 곳곳에는 크고 작은 우리 민족의 흔적이 수없이 흩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