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不毛地)’라는 사전적 의미는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거칠고 메마른 땅. 또는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이 발달돼 있지 않은 곳을 이르는 말로 정의되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지역사회에서 귀가 닳도록 들어 왔던 단어가 있다면 바로 ‘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단어였다. 지역방송이나 언론에서 우리 지역 문화예술 환경을 평가할 때마다 단골 언어로 사용되어졌고, 지역 원로들도 항상 입을 모아서 말씀하셨다.또한 모든 공기관에서 문화예술 행사를 시작하는 서문에는 우리지역 문화의 불모지를 운운하면서 시작했다가, 후문에는 이번 행사가 지역 ‘문
6·25전쟁으로 고아가 되어버린 소년 김두호는 1950년대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든 시절에 틈만 나면 재생지로 만든 도화지에 주변 풍경을 그렸다 한다. 아마도 혼자라는 외로움과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두호는 내적인 허한 마음들을 그림으로 풀어내는데 많은 위로가 돼을 것으로 짐작되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1955년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지역 각 초등학생들이 참여하는 종합 미술전시회가 포항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김두호도 작품을 출품했었다.이후 포항중학교 입학식 날, 미술교사 서창환 선생(이하 서창환)
1949년 9월 오사카 소네사키(曾根崎)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난 화가 손아유의 호적증명서에는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임곡리 592번지에서 부친 손수익(본관 경주), 모친 장을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재돼 있다. 재일 한국인들은 부모의 본적지를 출생지로 기재한다. 손아유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색의 위치’라는 작품에서 고추의 붉은 색을 연상시키는 민족적인 색채가 투영돼 있음을 보더라도 출신(족보)이라는 뿌리가 손아유의 예술세계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다.2010년 7월 손아유 작품 2000여점을 포항시립미술관
우리 지역에서 큐레이터 업무를 수행하면서, 2002년 대구아트엑스포 특별전의 도록에서 장석수가 포항 장기면 출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영남 화단은 근대자연주의 구상회화 작가들만 다루는 전시회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늘 아쉬워하고 있었던 터였다. 근대기 영남지역 출신으로서 한국 추상미술의 거목(주경, 유영국, 남관, 손동진, 정점식, 장석수)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조명하는 굵직한 전시회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정점식을 제외한 장석수(2003년 대구문화예술회관)와 남관(2012년 수성아트피아, 대
2014년 1월, 이경희 선생(이하 이경희)이 화려한 색상의 상의를 입고, 젊은이들이 쓸 법한 세련된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차남 이형봉이 끄는 휠체어를 타고 스타처럼 포항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을 위해 방문하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형봉에 의하면 차 안에는 두어 벌의 화려한 자켓과 다양한 형태의 선글라스 등을 준비하신다 하였다. 이경희는 젊었을 때부터 외출할 때는 항상 세련되고 완벽한 차림으로 외출하였다 한다. 당시, 누구랄 것도 없이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음악회나 기타 유료가 있는 행사에는 행사장의 관계자라 생각하
“박양이유? 여기 공덕동이요.”대백갤러리 근무 시절부터 장두건 선생(이후 장두건)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건네 온 인사말이다. 장두건이 불러주신 나의 이름은 항상 ‘박양’이었다. 아마도 나의 이름을 기억 하실려나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30여 년 간을 장두건을 뵙게 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마포구 공덕동 화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노화가의 모습이었다. 화실 구석구석에 세월을 안고 있었던 물건들과 화백의 심리적인 모습을 지켜보았던 것이 나의 마음에 크게 스캔되어 있다. 2014년 9월, 장두건이 포항시립미
1983년, 조희수 선생(이하 조희수)은 마땅한 전시장이 없어서 손수 임시 화랑(포항오리정 화랑)을 꾸며(벽면에 흰색 한지를 바르고 정돈함) 개인전을 열었다. 필자가 20세 때의 초반 나이에 포항 오거리에서 조희수 전시회를 도우면서 윤경열, 박기태, 박재호 등 경북지역 원로 문화예술인들을 접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보았던 작품 하나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1981년 작 ‘양지마을’이라는 작품이다. 따뜻한 5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지는 한옥의 툇마루에, 작은 소녀가 힘없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다. 1950년대 후
1960년대 초반, 초기에 활동했던 지역 미술가들이 외지로 모두 떠나버리고 거의 공백기에 가까운 분위기이었다. 이 시기에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구룡포중학교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화단에 생기를 불어 놓은 화가가 있었다. 바로 권영호 선생(이하 권영호)이다. 그는 구룡포초등학교 시절부터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방면에 예능적 기질이 탁월했고, 성격이 활달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의리로 다져진 인물이었다.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침체된 포항화단을 이끌어 가는데 일조했다. 1961년 ‘문동
포항 탑산은 한국조각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두 조각가의 작품이 있다. 김종영 선생(이하 김종영)의 ‘전몰학도충혼탑’과 백문기 선생(이하 백문기)의 ‘포항지구전적비’다.김종영은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이고, 백문기는 한국 사실주의 구상조각가로 유명한 작가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6·25 전쟁으로 인해 2점의 기념비가 탑산에 세워지게 됐다. 이들은 각자 추구하는 예술관이 다르다.하지만, 탑산에서 가까운 거리에 두 작품이 나란히 건립됐다는 사실은 의아스럽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사연이 있다.
‘삶’에 대한 본질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지역 죽도시장의 인상을 판화 작품으로 남긴 작가가 있다. 바로 목판화가 김우조이다.죽도시장은 해방 후, 입에 풀칠하기 위해 나선 어머니들이 ‘자식에게만큼은 이 고생 물리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던 생활 터전이었다. 오늘날 죽도시장의 인상을 만들어낸 그때의 어머니들이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어 냈던 강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6·25 전쟁 이후 화가 서창환이 포항중학교에 미술교사로 10여 년간 재직하던 시절, 친분이 있었던 김우조를 불러 들여 포항중학교와 포항여중에서 3~5년간
필자가 큐레이터 업무를 진행해 오면서 평소 아카이브 자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틈틈이 우리지역 미술사와 관련된 자료와 인물이 있으면 성실하게 기록하고 수집하고 있었다. 2015년 11월 16일 배원복 선생(이후:배원복)과 짧은 만남을 약속한 날이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날이었다. 배원복이 건강이 좋지 않아 바깥 외출을 일절 삼가신다는 말을 들은 것도 있었고, 연세도 고령(당시 92세)이신지라 곧 겨울도 오고 해서 바쁘지만 마음먹고 찾아뵈었다. 그동안 배원복과의 만남은 전시개막 행사에 정중히 인사
1938년 순전히 개인의 지적 호기심으로 펼쳐온 활동들이 우리 지역 문화예술의 풍토를 바꾸어 놓은 젊은이가 등장했다.바로 ‘청포도다방’의 대표인 사진가 박영달이다. 박영달은 어릴 적부터 혼자서 생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본인의 운명을 개척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그는 우리 지역 최초 종합문화공간인 ‘청포도다방’을 오픈해 3인의 문화운동가(한흑구, 이명석, 김대정)와 함께 포항근대문화예술사에 중요한 전환점(포항문화원, 포항예총 창립)을 마련하였고 포항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그리고 뒤늦은 나이에 사진예술계에 입문해
최종모의 소개는 ‘포항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사서(史書)에 간단히 기록돼 있다.“1950년대에 동경미대 출신의 서창환과 김우조, 배원복 등이 구상화 계열의 서양화와 한국화의 최종모가 주축이 돼 그룹전을 개최하거나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최종모 등은 포항을 떠나갔기 때문에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이어지는 향토미술사와 제대로 밀착되지 못했다”라고 언급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지역 화단의 여명기인 1950년대 최종모가 몇 안 되는 미술가 중에서 한국화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지역 화단 형성에 선각자적인 위치에 있음을 말해주
서양 미술사에서 초기의 수채화는 독립적인 작품으로써 제작되기 보다는 판화나 유화 등을 제작할 때 채색을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담당하던 화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화시간이라 해서 근대기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치원 및 초·중등학교에서 편리한 준비물로 인해 미술수업에 빠지지 않는 친근한 미술 장르이다. 그러나 광복 후에 유화의 보편화로 수채화가 점차 위축되어 갔고 하위의 미술문화 장르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대세이었다. 이러한 한국화단의 분위기에 독보적인 화법으로 위축되어 가던 한국 수채화를 격상시킨 이가 있는데 바로 수채화가 박
1980년 초반, 필자가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분이 있는 모 선생님께서 전시회에 사용할 유화 액자를 찾으러 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따라 나섰던 기억이 있다. 튼튼하면서도 심플하게 잘 만드시고 또한 저렴하다는 이유로 자주 의뢰한다고 하셨다. 중앙동(현 중앙우체국 뒤편)에 위치한 허름한 한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 한 켠에 마련된 장소에 여러 가지 제작 도구며 먼지가 쌓인 목재들, 그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완성된 액자들이 뒤섞여 있는 공간에서 나이가 훨씬 넘기신 중년의 젊은 노인이 계셨다. 큰 눈망울에 선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의 케테콜비츠는 ‘예술 활동이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시대정신을 강인하게 실천했던 화가이다.한국미술계에도 사회적 참여를 시작으로 현실의 삶과 고민을 바탕으로 당대의 시대정신의 큰 흐름인 민중미술을 탄생시키고 펼쳐온 사람이 있다.바로 미술평론가 김윤수 선생(이하 김윤수)이다. 김윤수는 1968년부터 한국의 정치사의 격동기에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문화 운동을 주도해 예술의 사회적 방향을 찾는 데 힘써왔던 인물이다. 김윤수는 1936년 포항 청하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영남지역 미술자료 발굴에 힘을 쏟았던 ‘영남의 구상미술전’을 추진하면서 참으로 귀중한 우리지역 전쟁기록화를 발굴하게 되었다. 경주 출신 화가 손일봉의 유족(딸, 손도자)의 자택을 방문하면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바로 ‘형산강 전투’라는 작품이다. 6·25 전쟁은 한국미술사에서는 공백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손일봉의 ‘형산강 전투’라는 작품은 한국미술사에 사적(史的) 가치가 매우 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형산강 전투’는 모 기업체에서 소장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작품이었다. 유
초·중등학교 시절, 용흥동 탑산은 학교에서 개최하는 미술대회도 참여하고 친구들과 자주 놀러 다녔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포스코와 포항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탑산은 공원다운 장소가 없었던 1960년대~80년대 포항역과 오거리가 가까워서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 역할을 하기도 했다.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 동안 큐레이터 업무를 수행하면서, 나름대로 우리 지역 미술사에 대하여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탑산에 있는 ‘전몰학도충혼탑’을 제작했던 작가가 김종영이라는 것을 외부지역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990년에 발간된 ‘포항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사서(史書)에 신대식(호 우송)에 대한 간략한 인물평이 나온다. ‘포항 서단의 개척자는 안진경 필법의 선구자 서병오 제자로 각광을 받고, 향토 서단에 크게 기여한 신대식을 들 수 있다. 석재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선전에 입선한 경력을 가지고 1970년대 초까지 포항의 유일한 서예가로 특히 대액에 능했으며, 서울,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개인전을 여러 번 열어 사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1970년 신대식을 중심으로 모석주, 김완승, 김종석 등이 제1회 향토서화전을 개최하면서 서예의 붐을
우리 지역 미술사에서 누구를 언제부터 연보(年譜)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큰 테두리에서 본다면 당연히 겸재 정선이다. 1733년 청하 현감으로 제수 되어 온 겸재 정선이 남긴 ‘갑인추 정선’이란 각자와 ‘내연산삼용추도’ ‘청하읍성도’ 등 청하를 배경으로 한 그림 5점은 겸재의 화력에서 기념비적 이정표가 되는 작품으로 한국미술사에 우리지역을 알리는 데 큰 문화적 자원으로 작용하고 있다.겸재 정선은 한국, 즉 조선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겸재 정선을 첫 인물로 정하기에는 한국미술사 차원에서 워낙 큰 인물이다. 또한 겸재가 국